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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인과 재물-윌리암 맥도날드

빠사나 2018. 12. 23. 07:02

그리스도인과 재물-윌리암 맥도날드


 

그리스도인과 재물(1)


당신의 보물은 어디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안전 금고 안에 있을 수도 있고, 하늘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라나 양쪽에 다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재물을 떠나든지, 그것한테로 가든지 하게 된다!'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급진적이고 극단적으로 들립니다. 그분은 과연 어떤 뜻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우리의 상식은 우리가 자신의 노년을 위하여 합당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또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얼마를 지혜롭게 비축해 놓는 일을 바라지 않으실까요?
그리스도를 따라간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심각한 질문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정직하게 부딪혀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무엇일까요?
성경을 믿는 자들의 재물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가르치실까요? 개인적으로 재산을 쌓아 올리는 것은 나쁜 일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사업에 성실해야 함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이 돈 버는 일을 금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할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장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행 18:1-3, 살후 3:8). 그는 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살후 3:10).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와 자기 가족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벌려고 애를 써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도 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가 붙습니다.

1. 자기 일이 주님의 일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마 6:33). 사업의 압력으로 인해 예배와 영적인 봉사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자기 가족에 대한 의무를 등한히 여겨서는 안됩니다(딤전 5:8)
대체로 많은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위한 시간을 점점 더 적게 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가족들에게 사치품과 재물을 아낌없이 베푼다고 해서 자기 가족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사치품과 재물은 그들에게 영적, 도덕적 타락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어나는 은행 계좌가 아니라, 경건한 남편과 아버지의 교제와 인도입니다.

3. 믿는 자들은 평판이 좋은 사업을 함으로써 돈을 벌어야 합니다(잠 20:17).
여기에는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거나, 도덕을 저해시키는 일에 기여하는 어떤 것을 생산하거나, 팔거나, 광고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요?
또 지옥으로 가는 대로상에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 같은 일에 종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요? 그리스도인의 일은 건설적이어야 하며, 공공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4. 믿는 자들은 돈을 벌되 정직하게 벌어야 합니다(잠 20:17).
그리스도인의 사업이 평판은 좋다하더라도 돈을 버는 방법이 부정할 수 있으며, 그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수입 세금 보고서를 조작하는 것(잠 12:22)
2) 상품의 무게와 양을 속이는 것(잠 11:1)
3)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잠 17:23)
4) 자기 상품이 다른 상품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무슨 중대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잠 20:6)
5) 경비 지출서를 거짓으로 꾸미는 것(잠 13:5)
6) 시장이나 주식 거래에 투기하는 것(이것은 일종의 도박임, 잠 13:11)
7) 고용인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잠 22:16). 야고보는 이 악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탄식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5. 그리스도인은 자기 건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님의 전(殿)이기 때문입니다(고전 6:19).

6.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탐욕스러워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마 6:24). 돈을 버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시 62:10).
이상을 요약한다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자기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건설적인 일을 하고 정직하게 거래하며,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탐욕을 피하는 범위내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발 수 있습니다.


소유하되 움켜잡지는 말아야 함

우리가 직면해야 할 다음의 질문은 '돈을 저축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입니다. 신약성경은 그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결코 부자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유산을 상속받고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는 문제에 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고전 4:1-2).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분의 돈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10%는 주님께 드리고 나머지 90%는 자기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은 신약성경에 제시된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2) 둘째로, 우리는 자기가 소유한 음식과 의복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이 말씀에서 "입을 것"에 해당하는 단어는 덮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지붕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단어는 여하한 종류의 거주지나 의복을 가르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6:8이 말씀하는 바는 우리가 생활의 밀수품들 곧, 음식과 의복과 거주지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주지 문제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지셨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마 8:29).

3)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낭비라도 피하고 할 수 있는 한 경제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5천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보고 남은 음식을 거두어 모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요 6:12). 그분의 본은 우리가 어디서나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것을 나무 많이 삽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 별로 쓸모없는 선물을 사면서 조그만 돈이라도 지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잠시 후에 창고 속으로, 또는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 쓸모없이 되어버리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싼 물건이 동일한 성능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비싼 물건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싼 물건만 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물건을 구입할 때 가격은 물론 품질이나 시간 등등의 사항들을 신중히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구입하려는 유혹을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인자(人子)를 위해 검소한 생활습관을 개발해야 합니다.

4)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다 주님의 일에 드려져야 합니다(딤전 6:8).
우리의 모든 소유는 다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업은 그분의 크나큰 대의(大義)를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주님의 일에 드리면 사람들은 무모하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근시안적인 행동을 한다고 즉각적으로 반감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성경에는 실제로 그렇게 한 어떤 사람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 사름은 과부였는데, 자기 소유의 전부인 두 렙돈을 연보궤 속으로 넣었습니다. 이 여인을 보신 주님께서는 그녀를 책망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부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부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의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3-4).

5) 주님께서는 우리의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우리들 중 대부분은 이 말씀이 차라리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것도 믿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도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 말씀이 마치 주님이 전혀 하신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사려 깊고 앞을 내다볼 줄 안다고 평하는 것들은 사실, 반역이요 불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는 말씀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존슨 박사는 언젠가 호화스러운 저택과 잘 가꾸어진 땅을 두루 돌아다닌 후에 자기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와같은 것들이 우리를 죽기 어렵게 만들지요'.

6)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신의 장래를 위해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마 6:11),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기 위하여 날마다 그분을 바라보도록 만나 이야기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출 16:14-22).
그분 자신이 우리의 안전이요, 보장이 되어야 하며, 이 세상의 부러진 갈대를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그분의 뜻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며, 자기는 단지 주님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생활 필수품에 만족해야 하며, 우리의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아야 하며, 장래를 위해 그분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재물(2)

무엇이 해로울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나쁠까요?

1) 무엇보다도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마 6:19).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 왜 나쁜 일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종결지어야 합니다.

2) 그것은 현세의 엄청난 필요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잠 24:11-12).
수많은 성인 남녀들과 소년 소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이나 좋은 복음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그리스도 없이, 소망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영적 살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겔 33:6).
그리고 그것은 축재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일편담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음을 공공연하게 증거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
구약시대에 굶주리던 4명의 문둥병자가 많은 양의 식량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굶주림을 채운 후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려고 달려갔습니다(왕하 7:9).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던 문등병자들보다 더 못한 동정심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3) 그것은 세상의 엄청난 육체적 필요에 냉담하기 때문입니다(잠 3:27-28, 11:26).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 집 대문에 있던 거지에게 아주 무관심했습니다. 만일 그가 창문으로 가서 아름다운 휘장을 열어젖히기만 했더라면, 그는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 자기 돈의 얼마를 보태주어야 할 합당한 대상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관심했습니다.
이 세상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우리의 대문 앞에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만일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지금 듣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음과 같은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2, 45).

4)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비평할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롬 2:24).
그것은 볼테르(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가)를 자극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습니다. '돈이라는 문제에 이르게 되면 모든 사람은 동일한 종교를 갖게 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님이 우리보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간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호화로운 집과 사치스러운 자동차, 식도락들의 음식, 값비싼 의복에 탐닉하는 분명한 모순을 드러냅니다.
지금은 교회가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교육을 받은 온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말해 보십시오.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비평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맹렬히 반대하는 것은 예수님의 윤리가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이 궁핍한 세계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쌓아 올리는 재물인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빛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교회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다 떨어진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는 이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5) 그러나 우리는 불신자에게 미치는 영향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에게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우리의 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관은 일요일에 우리가 전하는 감동적인 멧세지에 의해 많이 드러난다기보다는 우리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추구하는 목표에 의해 많이 드러납니다.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장막"의 값을 평가함으로써 우리의 순례길의 진실을 판단합니다. 펜으로 싸인 한 번만 하면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자금 지원을 해달라고 강력하게 호소할지라도 그들은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허비되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본을 따라가는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17:1-2).

6)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왜 악한지에 대하여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말 3:8).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직접 사용하여 그분의 이자를 증식시킬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넘겨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수건에 싸서 감추어 놓는다고 해서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눅 19:20-26).

7) 청지기 된 우리가 재정 문제에 있어서 주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성경의 일부를 우리에게 닫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마 6:22-23).
우리는 아주 단순한 말씀들을 눈앞에 놓고서도 그것들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어떤 공부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삶 및 책임과 무관하면 무관할 수록 우리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악한 왜곡성은 타당한 결론을 내리는 일에 적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부가 우리의 창조주에 대하 책임에 밀접하게 관계되면 관계될수록 우리의 악한 본성은, 우리가 믿기를 원치 않는 진리들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리려고 더욱 노력하며, 또한 그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가설에 집착하려고 더욱 노력합니다'.
헤링톤 리즈(Harrington C. Lees)는 이것과 연관지어 언젠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문명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은 그의 호주머니이며, 설교자는 청중들의 호주머니를 건드리는 설교를 할 때 가장 격렬한 싸움 중의 하나를 싸웁니다'.
우리가 시온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에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와는 거의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순종하지 않는 말씀들들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 불순종하는 것도 우리에게 삭제된 성경을 갖다주는 저주를 초래합니다(마 13:14-15).

8) 재물을 축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재물을 갖고서도 그것을 의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그것을 얼마나 의뢰하고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잠 18:11).
부자는 돈, 곧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며, 자기에게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돈을 의지합니다. 따라서 만일 그가 그것을 한꺼번에 갑자기 잃어버린다면 그의 버팀목과 지주(支柱)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는 돌연한 공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는 보이는 은행 잔고를 더 의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빼 놓고는 의뢰할 사람이나 사물이 없다는 생각은 신경의 붕괴를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들어 있으면서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재산이 있거나, 또는 다른 몇 가지의 기분 좋은 보증이 있다면 우리는 우연한 사고와 변화에 대해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불안한 마음으로 불신하는 위험에 놓여있습니다'(사무엘 콕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계속적인 위기의식을 갖고 그분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물을 이 땅에 쌓아 놓을 때 그분의 뜻은 우리 때문에 좌절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참된 보장을 갖는 유일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굳게 하려 하심이라"(롬 4:16).
믿음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유일한 삶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히 11:6).
하나님의 약속만큼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삶은 당연히 걱정으로부터 해방된 삶입니다. 신경과 감정의 무질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로부터 생겨납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삶입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행할 때에 우리는 인간의 재능과 영리함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불신자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의 삶이 그 뒤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편에서의 의도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의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위치에 자기 자신에 두어야 합니다. 그는 자기 소유를 전부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남겨 놓은 것들과 기타 다른, 거짓된 지주들을 제거할 때에만 비로소 그는 참으로 은혜의 깊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9)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께서 여전히 배척을 받으시고, 그분의 핍박을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왕처럼 행세하는 것은 그분을 욕되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묘사하기를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가장 훌륭한 옷을 입고, 스타디움에서 가장 비싼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그렸습니다. 이것과 동시에 그는 사도들을 묘사하기를 투기장안에 있어 맹수들에게 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4:8-13).
고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면류관을 쓰시기 전에 왕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관식에서 군주가 면류관을 쓰기 전에 더 낮은 지위에 있는 인물들이 삼중모(三重帽)를 쓰는 것은 심상치 않은 불경(不敬)을 의미합니다.

10)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본에 정반대가 됩니다.
그분은 한없이 부요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고후 8:9). 신약성경의 원리를 살펴보면 '가난한'으로 번역된 단어에 해당되는 원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생활 필수품 외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노동자의 상태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재물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주 예수님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는 두 번째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본을 끝까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11) 재물이 지니는 또 다른 해악은 기도 생활을 손상시킨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물자들이 다 장만되어 있다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해달라고 구하는 가식입니다. 예를 들면, 믿는 우리 자신의 어떤 계획에 필요한 돈을 즉시 제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소요되는 자금을 공급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이 자기 돈을 사용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2)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자가 되려는 소망을 갖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초기 성도들의 가난은 자산이었지 부채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기독교는 하늘부터 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전도자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청중들에게 줄 돈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청중들을 겁나게 할 군대를 대동하고 있었다면 불신자들은 그들의 성공에 놀라워 할 것이 없다고 반박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제자들의 가난은 그와 같은 반박을 즉시 묵살할 수 있었습니다. 뇌물을 주거나 순종을 강요할 어떤 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비천한 갈라디아 사람 몇이 육(肉)에 속한 사람들의 구미에 전혀 맞지 않는 가르침을 가지고 세상을 뒤흔들었으며, 로마 제국의 외모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파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진리였습니다'(J. C. 라일)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에서 앉은뱅이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어떤 것을 적선해 달라고 요구하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

 

그리스도인과 재물(3)

동결된 자산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왜 나쁜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는 자들의 자신의 장래와 가족들의 장래를 위해 돈을 저축해 두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반론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반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노년을 위해 돈을 따로 비축해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는 항상 만일의 경우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것을 주어 사용하게 하셨어요'
이와 같은 반론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소리가 아닙니다. 장래를 위해 비축해 두는 것은 우리로 주님을 의뢰하게 하는 대신 비축해 둔 것을 의뢰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일단 자신의 장래를 위해 비축해 비축하기로 결정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나의 장래를 위해서 어느 정도 비축해 놓는 것이 좋을까?'
'나의 수명은 얼마나 될 것인가?'
'불황은 없을 것인가?'
'인플레이션은 없을 것인가?'
'무거운 의료비를 부담하게 되지는 않을 것인가?'
이상을 고려해 볼 때 자신의 장래를 위해 얼마를 비축해 놓으면 좋을지 도무지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몇 년의 짧은 퇴직 기간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소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탈취를 당하시며, 우리의 삶은 보장을 얻지도 못하는 일에 허비될 것입니다.
이것보다는 우리가 현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주님을 한껏 섬기며, 현재의 필요 외에는 모두 주님의 일에 드리고, 장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분을 의뢰하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 일이겠습니까? 그분을 첫째 자리에 두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리고 진리의 확장을 위해 주님의 돈을 사용하고 있던 빌립보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요즈음의 철학 가운데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극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자기 삶을 바치다가 은퇴하고 나면 그 때 가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회사에 드리다가 그 남은 찌꺼기를 주 예수님께 드리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찌꺼기조차도 너무나 불확실하여 미처 우리가 성경의 먼지를 떨어버리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카멜론 톰슨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시 손에 아무 것도 달라붙지 못하게 애쓰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축복을 쏟아 부으십니다(이 말은 사람들은 자시 손에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뜻임).
그러나 현 세계의 비참한 상태보다 만일의 경우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디모데전서 5:8을 인용하여 재물을 축적하는 일을 정당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위의 말씀이 나온 문단에서 바울은 교회의 과부들을 돌아보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과부에게 그리스도인 친척이 있다면 그 친척이 과부를 돌아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과부를 돌보아줄 친척이 없을 경우에는 교회가 그녀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과부의 장래를 위해 자금을 비축해 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녀의 현재의 필요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핍절한 가운데 지내는 자기 친척들을 날마다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것은 사랑과 후덕을 가르치는 기독교인의 믿음을 실제로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불신자들도 자기 가족과 친척들을 돌보는데 하물며 믿는 자가 그러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은 적립금이나 생명보험과 같은 장래의 의무가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다루고 있습니다.

3) 세 번째의 반론은 두 번째의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게 상당한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자신들의 책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친족을 돌아보는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딤전 5:8).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 주님을 믿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기 자녀들에게 상당한 밑천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4절도 부모들이 돈을 저축하여 두었다가 자기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가르칠 때에 종종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
그러나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은 바울의 재정 지원에 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고린도 사람들에게서 헌금을 받지 아니하고 다른 교회로부터 받았습니다(고후 11:7-8). 이제 고린도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마당에 그는 그들에게 짐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습니다(고후 12;14). 다시 말해서 그는 그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물질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그들의 영적인 안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던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린도 사람들은 자녀들이었고 바울은 부모였습니다(고전 4:5). 바울은 분명히 풍자적으로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이 자기를 지원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가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그들이 재정적으로 그를 지원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고전 9;11,14). 하지만 고린도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가 이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문단이 장래를 위하여 재물을 비축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간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어린 아이의 쓸 것을 공급하느니라'

신약성경이 자녀들을 위해 유산을 쌓아 올리는 일을 지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부모가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영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버는 일에만 급급하는 것은 이 영적인 유산을 예비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남겨 놓은 재정적인 유산으로부터 초래될 죄악들을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얼른 들을 수 있습니다
-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에게 갑자기 주어진 재물 때문에 영적으로 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질과 쾌락에 취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망치고 있습니다.
- 유언장과 많은 재산으로 인해 생겨난 가족 간의 갈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매가 자매를 시기하게 되고, 형제가 형제를 시기하게 됩니다. 쓰디쓴 분쟁이 그들의 나머지 생애에 계속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3-14에는 유산을 둘러싸고 일어난 한 가정의 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와 같은 일에 관여하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와 같은 일을 하시려고 지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언장에 이름이 빠져있는 그 불행한 사람에게 탐욕에 관하여 엄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쳐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면 자기 자녀들에게 짐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은혜를 모르는 자녀들은 부모의 유산을 빨리 손을 대고 싶어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 구원받지 못한 자녀들에게나 또는 불신자와 결혼한 자녀들에게 남겨진 재산은 종종 잘못된 교회로 헌금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수가 많습니다. 믿는 자들의 돈이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사용되다니 정말 안되는 소리입니다!

믿는 자들은 유언장에 남겨 놓은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받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죽는 순간, 그들의 유산은 더 이상 자기 소유가 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지는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우리의 돈이 주님을 위해 사용되는 일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며, 오직 이것만이 미래에 보상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고 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재림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소유가 점점 더 가치를 잃어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이 오실 때에는, 재물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방책은 우리의 소유를 바로 지금 주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이 때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것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검소한 생활을 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제외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주님의 일에 드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요? 그 대답은 그럴수록 더욱 믿음으로 살고,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고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시절 그렇게 하는 것이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44-4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행 4:34-35)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기록하면서 바울은 우리의 물질이 유동성이 있어야지 동결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어떤 참된 필요를 인식할 대마다 우리의 자금은 언제든지 필요한 곳으로 흘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자신이 필요로 처하게 되면 자금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로 흘러올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평균케 하는 일이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3-15).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참으로 헌신된 삶을 살며, 자기 소유에 대해 청지기 직분을 충실히 해왔다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람의 필요를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일을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의지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비위를 거슬린다는 갓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심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삶의 표현이지 주 예수님의 삶의 표현은 아니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5:3-13에서 과부들을 돌보라고 지시하는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속에 발산되는 교회, 성도들이 서로 돌보는 교회, 돈이 참된 필요가 있는 곳으로 자유롭게 흘러가는 교회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박하기를 그것은 초대교회 시절에나 해당되지 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반박은 역시 '그것이 오늘날에도 역시 해당되고 역사한다'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생활하는 그리스도들은 많이 있으며, 그들의 삶에는 힘과 매력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5) 그러나 많은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2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차할 줄도 알아"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이처럼 반론을 제기하는 사름은, 비천에 처한 바울을 어떻게 그려보고 있느냐 하면 낡은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을 신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지친 모습으로 길도 없는 사막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풍부에 처한 바울은 별장 같은데서 2주 동안 호사스럽게 지내는 청년이 최신 유행의 복장을 하고 검게 탄 얼굴로, 접는 포장이 달린 호화로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생할 줄도 알았고, 호사스럽게 살 줄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편지가 해변의 별장 같은데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 기록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빌 4:18).
바울은 수감되어 있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풍부한 상태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12을 사용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정당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6) 그렇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딤전 6:17)
이 구절은 믿는 자들도 '생활의 좋은 것들'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종종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곧, 믿는 자들이 최신유행을 타는, 가장 좋은 것을 마음껏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디모데전서 6:17절의 문맥을 잊고 있습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다시 말해서 이 구절은 방종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하시는 엄한 지시에 관계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것들을 주시되 쌓아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그것을 누리기를 원하시며, 이것은 그 말씀에 이어지는 다음 두 구절을 볼 때 명백해집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재물을 누리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고 축적하는데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7) 또 우리는 아브라함이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창 13:2, 약 2:23).
이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번영이 약속된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있어서도 역시 해당될까요? 이 경륜의 축복은 역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구약의 기준들은 뒤바뀌었습니다(눅 16:19-31). 이 부자는 다른 사름을 위해 자기 재물을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쌓아두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았던 것입니다.

8) 그러면 개미에게로 가서 교훈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이 말씀은 개미가 장래를 대비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역시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개미의 장래는 이 땅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장래는 저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이자 나그네이며, 그들의 집은 저 하늘 위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장래를 위해 보물을 반드시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사람이 관계되는 한 믿는 자들은 내일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마 6:25). 그들은 자기 보금자리 옆에다 곡식 창고를 결코 짓지 않는 새들을 닮으라고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잘 돌보시겠습니까?

9) 어떤 사람은 부자들에게 접근하려면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논박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들은 심지어 이방의 부자들과 대인(大人)들의 집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살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의 구원을 말해 주기 위해 지금 종으로 고용되거나 노에로 팔리기까지 했다'라고 말합니다(J. R. 밀러)


그리스도인과 재물(4)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풍기가 문란해지는 세상에서 부요한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정당화하려는 주요 논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논박들에 대하여 성경의 많은 부분들은 우리에게 재물의 위험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1)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富)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작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리라.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을 알지 못하느니라"(잠 28:20-22).
재물을 찾아 미친 사람처럼 헤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2)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 말씀에는 하나님과 돈이 두 주인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 두 존재의 관심사는 서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을 동시에 섬기기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세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 곧 현재에도 부자로 살고 그 때에 가서도 부자로 살고자 하는 욕망, 아래에서도 재물을 즐기고 위에서도 그것에 대해 상급을 받고자하는 욕망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둘을 다 가질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야 합니다.

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3-26).
저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분은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일이 어렵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늘귀가 성문에 있던 조그만 쪽문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약대가 그것을 통과해 들어가려면 몸을 구부려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바늘은 바느질에 쓰이는 실제의 바늘을 가리키며,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는 약대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일어나는 특별한 기적만이 부자를 천국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원한 복지에 그처럼 방해를 끼치는 것을 옹호하려고 애쓸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3-34)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22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회피해 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어째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와 같은 말씀들을 거절하는 것은 곧, 축복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소유를 팔아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은 이 은혜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은행의 지하 금고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늘에 있습니까?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5)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2-23).
우리는 그 부자 청년 관원은 특별한 경우이고 모든 소유를 다 팔라는 명령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위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방금 전에 생각해 본 말씀(눅 12:33-34)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본질상 다르지 않습니다.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딤전 6:6-11)
바울은 돈을 사모하는 자들이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근심은 어떤 것일까요?

- 첫 번째 근심은 재물의 뒤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걱정입니다.
"부자는 그 풍부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우리말 성경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로 나와 있음, 전 5:12).
안전을 보장해 줄 것으로 생각되는 재물은 정작 그 반대를 갖다주는데 그것은 곧, 강도, 주식 시장에서의 증권시세 하락, 또는 인플레이션 등등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입니다.

- 두 번째는 자기 자녀들이 지나치게 풍부한 물질로 인해 영적으로 실족하는 것을 보는 슬픔입니다. 재물이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 중에서 주님을 위해 계속 살아가는 자녀들을 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 부자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잠언 14:20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잠 14:20)
하지만 그들이 과연 참된 친구들일까요? 아니면 그저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친구 노릇을 하는 사름들일까요?

- 재물은 결국에 가서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지 못하고(전 2:8,11), 더욱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킵니다(전 4:8, 5:10).

- 재물은 종종 부자의 성품에 악영향을 미쳐서, 예를 들면 교만케 하고(잠 28:11), 무례한 태도를 갖게 합니다(잠 18:23, 약 2:5-7).
메튜 헨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재물에 대한 히브리 원어는 '무겁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재물은 하나의 짐인 셈입니다. 그것을 벌어들일 때 생기는 걱정의 짐이요, 그것을 지킬 때 생기는 두려움의 짐이요, 유혹의 짐이요, 슬픔의 짐이요, 마지막에 가서 설명해야 할 즉, 하나님 앞에 가서 자신의 재물의 용도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짐입니다.

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부(富)한 자들을 명하여 ... 하라"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종들 중에서 이 부탁을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들 중에서 누가 부자들에게 명해 보았습니까?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구절에 관한 멧세지조차 들어보지 못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멧세지가 오늘날처럼 필요한 때는 아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멧세지를 전하려면 우리가 먼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재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입술을 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과가 어떻든 간에 자기 말을 아무 두려움 없이 전파하는 선지자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다음과 같이 소리친 아모스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1-3).

또는 다음과 같이 외친 학개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학 1:4).
물론 이 선지자들은 전혀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당대의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았고, 사회적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핍박을 받기도 했으며, 그래도 그들의 입을 막지 못하는 경우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진리를 말하고 죽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재물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영적인 능력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왕노릇하는한 부흥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분연히 일어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음과 희생의 생활로 되돌릴 사람은 안계십니까? 사람들에게 진짜로 사는 것 같이 사는 법을 보여줄 사람은 안계십니까?
'단 하나의 참된 삶은 영원의 빛 가운데서,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해 우리의 모든 소유를 사용하는 삶입니다. 이것만이, 오직 이것만이 참된 삶이니다'(C. H. 매킨토쉬)

8)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10-11).
부자는 자기 재물을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자기가 맞아지는 것을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재물은 풀처럼 시들어 없어져 버리지만 영적인 경험과 교훈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약 5:1-6).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성령님께서는 재물을 쌓는 것(3절),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고 돈을 버는 것(4절), 사치한 생활을 하는 것(5절), 대항할 힘이 없는 의인을 이용하는 것(6절)에 대해 소리 높여 경고하십니다.
이 말씀이 신자들에게 기록되었건, 불신자들에게 기록되었건 오히려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이 발이 맞으면 우리는 그것을 신어야 합니다.

10)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7-19)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주님의 통렬한 말씀이자 교회들에게 하시는 그분의 마지막 멧세지입니다. 이 말씀은 구태여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위의 말씀이 우리에게 특별히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재물(5)

게으른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

이와 같은 글은 나태의 구실로 이용될 위험성으로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일하기를 무척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니까요! 저는 그것을 변함없이 믿고 있어요'.
글쎄요. 이 멧세지는 게으르고 굼뜬 사람들이나 혹은 세상(또는 교회)이 자기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멧세지를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네 침대에서 일어나 일하러 가자"(살후 3:6-12 참조).
이 멧세지는 진지하고,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자기 자족의 현재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주 예수님의 관심사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장래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에 대한 경고

피해야 할 위험성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보고 그 사람을 정죄는 위험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해도 안되면, 다른 사람의, 주님께 대한 헌신을 의심해도 안됩니다.
재물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나온 원칙을 선포하는 것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집에 가서 그의 순수한 재산목록을 대충 조사한 후 그에게 정죄의 손가락을 흔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그것을 자기 자신의 삶 가운데서 실천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가족의 현재의 필요가 단 한 사람의 필요보다 훨씬 많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청지기인 우리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 결산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감독관처럼 신랄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지 않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는 자들이 음식과 의복과 주택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 믿는 자들의 자기 가족의 현재의 필요를 마련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에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자신의 장래를 위해 재물을 쌓지 말고 그 문제를 주님께 의뢰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의 중대한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이것에 예속되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가르쳐졌고, 사도행전에서 실천되었으며, 서신서에서 상술(詳述)된 삶은 바로 이와 같은 삶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첫째로 되는 본은 주 예수님은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의 제기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삶을 어떻게 실제로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1) 제일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고후 8:5).
그분이 우리 자신을 소유하시고 나면 우리의 소유물 또한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2) 그런 다음에 주님이 우리의 삶의 여러 영역에서 손가락으로 무엇을 지시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즉시 반응해야 합니다.
아마 그분은 식당에서 값비싼 음식을 사먹은 것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가 최신 모델의 값비싼 차를 쳐다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수수한 차를 사고 그 차액을 복음의 확장에 드리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의의 옷을 입하시기 위해 우리의 옷장에 혁명을 일으키실지도 모릅니다. 혹은 덜 얽매이는 직업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값비싼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을 포기하고 덜 허세부리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 일에 관해서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문제들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3) 세 번째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친구들이 여러분을 오해하고, 친척들이 여러분을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가족들의 반발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고, 그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4) 현재의 필요 외에는 모두 하나님의 일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하나님께 인도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헌신에 대해 언젠가 요한 웨슬레가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세대에서 그 보상을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기원합니다.
"오, 하나님,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금후 제가 이 세상을 떠나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되는 것을 보기 원하며, 그들이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고 세상도 그들에 대하여 못 박히는 것을 보기 원하나이다. 사람들이 몸과 혼과 존재가 하나님께 참으로 드려지는 것을 보기 원하나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저는 참으로 기쁘게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도다'라고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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