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와 존재에서 "본질적인 것"에 관한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hkhart)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특별한 교훈이 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 의하면 자기의 본래적 삶과 그 동인들을 깊이 성찰하는 인간이라랴 비로소 오늘날 세계의 환경위기, 체지위기, 가치위기 등에 민감한 정신상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롬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술세계와 산업사회의 위기는 인간의 소유정향(Haben-Orientierung)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단지 주변환경을 이루고 있는 욕구들에 굴복당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영적 청빈에 관한 엨크하르트의 가르침은 프롬에 의하면 맑시즘과 프로이디안이즘 이후 인간사회에 새로운 빛을 던져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롬의 논제 즉 사회분석을 영성에로 환원시키는 것은 몇몇 인사들에 의해서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프롬의 존재개념은 이타주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과학과 경건이 혼합되어 결국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프롬의 이런에 의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리고 소유의 성공에 대항해서 존재가 제 구실을 할 수 있는가? 또 현실적인 무소유가 존재한다면 그 때는 모든 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상 존재론의 윤리적 적용이란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더 복잡하며 존재개념은 철학사에서 너무나도 짐을 지우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롬은 존재개념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사회심리학적 용어를 통해서 인간의 정체성을 해명했으면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면 프롬이 자기 이론의 기초로 삼고 추구하고 있는 중세기의 신학자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는 어떤 인물이며 그가 살아간 시대는 어떤 시대고 왜 그는 당시 이 존재의 문제를 그의 신학의 핵심으로 삼았는가를 살펴 보자.
13-14세기의 역사적 배경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는 1260년 지금의 독일 땅인 튀링겐의 농부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1275년 엘풀트의 도미니칸 수도원에 들어갔고 1277년에는 파리대학으로 가서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1280년 독일의 콜른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이 때 그는 당대의 대신학자인 대 알버르투스를 만나게 된다. 1293-4년 그는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파리에 가서 롬바르두스의 강의를 하게 되고 1302년에는 석사가 되어 파리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여기서부터 그에게는 마이스터라고 하는 교수직의 명예가 주어진다. 여러직을 거쳐서 1323년에는 쾰른의 신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326년 콜른의 대주교에 의해서 이단으로 고발당해서 종교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1328년 아비뇽에 유폐되어 있는 교황을 방문하는 길에 사망했다. 에카르트가 활동했던 13.4세기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의 "위험하고 해방적인" 활동을 이해할 수 없다. 중세기가 다 끝나가던 이 시대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운동들"을 통해서 특징지얼 수 있을 것이다. ㅇ 디때는 중세의 농업중심의 사회가 도시화를 거치면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고 상업의 발달이 시작되던 시대였다. ㅇ 교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대단히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교황의 아비뇽 유폐가 그 예이다. 이것은 교회의 공의회적 개혁을 추구하게 했으며 가시적인 교회의 모습 즉 제도적 교회가 보다 신앙적인 것에 몰두하게 된다. ㅇ 이와 함께 새로운 말씀의 복음에 기초한 경건이 걸식수도승단의 삶이나 가르침, 그리고 다른 자유로운 공동체에 확산되었다. 이것이 신체적이고 영적인 청빈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었다. ㅇ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변혁기를 맞이하여 유대적-이슬람적 사상과 영지주의적 가르침및 생활형식들이 뒤섞이면서 일련의 "이단들"과 종교혼합이 등장했다. 이것은 12세기 십자군 운동 이후에 동방과의 잦은 접촉을 통해서 나타난 중세적 카톨릭의 보편성의 해체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ㅇ 자유정신을 가진 카리스마틱한 운동의 확산은 공교회에 의해서 이단에 대한 종교재판과 마녀들에 대한 대량학살로 대치되었다. 주로 도미니칸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종교재판도 이러한 새로운 시대정신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14세기 유럽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전의 농경사회로부터 도시사회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적 발전이 시작되던 시기이다. 외적으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절대군주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교황권의 약화는 가톨릭의 보편주의를 위협하고 내적으로는 제도화된 교황교회에 대한 대안으로서 복음에 충실하려는 걸식수도원 운동등이 확산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엨크하르트는 자기의 사상과 운동을 전개했다.
엑크하르트의 사상
그러면 그가 28개 항목에 달하는 고발을 당하고 그 중 15개 항목이 교황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나머지는 매우 이단에 가깝다는 판정이 난 그의 사상은 어떤것인가? 여기서 짧은 지면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다 취급할 수 없기 때문에 "영혼에서의 신의 탄생", "여유"등 그의 사상의 주요개념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영혼에서의 신의 탄생"은 엑크하르트가 요한복음 1장 14절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으로서 영혼이 신의 출생의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신은 이와 같은 탄생을 통해서 영혼 안에서 완전성, 빛 그리고 은총이 된다. 성부가 나를 영혼 안에서 자기의 아들로 낳아 주신다. 즉 "그는 나를 자신으로서 자신을 나로서, 나를 자기의 것으로 낳아주신다." 따라서 영혼 가운데서의 신의 탄생은 신플라톤주의적 본질이해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엑크하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이 활동하는 영혼의 근거를 그는 작은 불꽃이라고 했다. 이것이 엑크하르트에게서 시작되는 독일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이 불꽃은 두개의 기능을 가지는데 선한 것을 받아드리고 악한 것에 저항한다. 신에 의해서 규정되는 세계의 최고의 힘들이 영혼을 규정한다. 첫째는 바른 신적 진리의 인식이고 둘째는 뭔가 고귀한 것을 향해 일하게 하며 마지막으로는 신의 뜻으로 나아가게 하는 의지등이다. 그러나 신과 영혼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영혼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영혼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은 마치 태양이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스콜라주의의 객관주의적 신이해와 교리체계에 대항하여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이해가 가져다준 독일신비주의와 그것이 후에 종교개혁및 개신 신학사상에 미친 영향을 용이하게 포착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덕목 가운데 최고의 덕목은 단절(Abgeschiedenheit)이다. 단절이란 마음을 비우는 것이며 모든 것들에 대해서 관계를 끊는 것이다. 이 단절은 영혼의 청빈을 통해서 달성된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청빈한 인간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힌 의지, 지식등이 인간을 부패하게 만든다. 마음에서의 청빈, 단절에서의 존재가 신과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자유와 넓이를 제공한다. 우리가 신비주의라고 칭하는 이러한 단절의 길은 매우 정확하고 이론적인 배경을 가진다. 즉 단절은 정확히 말해서 무제약적 개방성이며 모든 것을 위한 지식이다. 다음의 덕목은 여유(Gelassenheit)이다. 이것은 단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서 엑크하르트에 의하면 마음을 비우고 휴식하게 하는 것이며 소유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한계를 정해주는 것이고 수세미처럼 복잡한 데서 단순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들에 직면해서 안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여유이다. 이러한 여유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역시 세상에서의 욕망과 자기를 단절시킬 때 가능하다.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자기 통일성(Einheit)와 함께 순수성(Reinheit)을 얻게 된다. 모든 것을 욕망의 충족과 관련된 업적주의에 의해서 평가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엑크하르트는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논제에서 출발함으로써 윤리의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업적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환경위기, 체제위기, 가치위기에 직면하여 우리는 이 신비주의적 신학자의 영성적 존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92.3.28 새누리 신문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