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선생님의 여행기
사랑하는 동역자 님께
나눈 긴급제목을 노래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주 11월 12일(화) 아침 따이담과 따이댕 종족 일군들이 모여 12월 현지인 훈련을 위한 준비모임을 했는데. 미국인부부, 스위스부부는 따이담족을, 저는 따이댕족 일군으로(3가정 각 다른 회사 소속), 따이담 족은 이미 ㅂ음을 받은 종족이라 현지인 4명도 함께 참석했습니다. 미국인부부의 ‘삼느아’ 따이담 마을 방문에 저는 따이댕족 조사차 합력; 외국인/여성 혼자서는 여행할 수 없는 곳, 약 이천m 해발의 정글이기에 탱크 같은 차량이 아니면 여행 불가능한 곳, 60도 각도 커브 길을 끼고 또 급히 돌아야 하는 절묘한 운전기술이 아니면 차로 마을 구석을 찾아 방문할 생각은 아예 할 수 없는 곳이라 제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11월 13일 오후 출발, 북쪽 도로 13번 길목 시장에서 바케트(약간 마르고 딱딱한 불란스빵)사서 땅콩 쨈을 발라 차 안에서 행동식/저녁 식사해결, 안전을 위한 기ㄷ와 함께 부르는 찬양, 차 안에서 나눈 교제는 제가 이 곳에 온 이후로 제일 풍성한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A & J, 두 분은(62세) 최 북쪽‘복캐오’중국 접경 지역에서 콩 심는 사업을 하시면서 북쪽전역 방문, 현지인에게 씨를 주고 수확 후 사들여 시골지역의 소득증대와 더불어 ㅂ음을 전하시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거침없이 주심에 많은 도전을 받았답니다. 길 가다 문제 발생된 차량을 돕는 것은 물론, 가는 길이 바쁘지만 바람이 새는 타이어를 수리하는 마을에서 외국인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필요(주민들의 아픈 곳을 간단히 치료)를 돕고, 온 몸 화상을 입은 남편을 고쳐달라고 하는 부인의 요청을 차마 거절 못해 남편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병원은 간 적도 없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직전; 민간요법대로 무당을 불러 제를 지낸 것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치료였습니다. 마을 촌장, 부인, 몇 사람 증인에게 이 환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할 수는 있지만 만약의 사고에 책임 없음을 분명히 한 후 귀신보다 능력 있는 ㅎ나님을 증거하며 회개할 것을 요구; 도시 병원으로 입원시켜 생명을 건진 후; 이웃들의 경고(외국인 기ㄷ교인 조심)에 그 남편은 오히려 죽은 자신을 살린 ㄱ독교인은 좋은 사람이라고 전하는 증인이 되었답니다. 왜 그 마을에서 타이어를 수리하게 되고, 그들을 만나게 하신 ㅎ나님의 계획과, 또 이번 여행길에 그 부부를 만나 격려, 이웃들에게 인사를 나눈 것 만으로도 살아계신 그 분을 전할 수 있어 기적 이였습니다.
어느새 ‘비엔티엔’시를 벗어나 ‘비엔티엔’도를 달리고, 산속의 계곡으로 들어서면 흰 것은 도로, 검은 것은 산, 전기가 없어 보름달은 더욱 빛나지만 포장된 도로가 파손되어 망가진 도로/구덩이를 피하는 운전기술이 절대 필요했고 북쪽 ‘가시’란 마을은 예전부터 반란군(?)의 문제가 많은 마을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일박; 게스트하우스가 이 곳에만 있기 때문!
11월 14일
해외에 많은 이들 종족사람들이 있어 여러 가지로 국내에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시엥쿠앙’ 도 ‘폰사완’ 가는 도로는 닦여있지만 워낙 커브가 많아 평소에 멀미 않는 저도 머리 아프고 멀미 분위기였답니다. 한 마을을 지나면서 도로의 2/3가 비에 쓸려 낭떠러지가 되어 아찔한 경험! 또 깊이 패인 진흙 길을 운전하는 것도 모험이고요. 이상기온으로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 피해가 많았는데 다행히 추수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어 기뻤습니다.
해발 1700m에 평원 같은 곳이 있어 이 지역의 부유함을 느낄 수 있었고, 방문한 따이담 마을 주민들이 함께 마른 옥수수 분리 타작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또 자체적으로 종족 박물관을 짓고 있는 건물을 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모습에 찡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따이댕 마을을 물어 찾는데 대답하는 사람들마다 각각이라 지나간 길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찾은 집은 치과 의사(‘비엔티엔’에서 공부) 집으로 따이댕 언어로 이야기하며 마을 상황과 종족 관련된 여러 가지들을 자연스럽게 조사하는데 외국인들을 처음 보는 의사 부부는 자기들이 복 받았다고 하는 바람에 진짜 복 되시는 분을 잠깐 전하고, 6살 딸 은 겁이 나서 오지도 못하지만 이웃사람들은 점점 모여들어 저희들은 볼거리/구경거리가 되었지요. 현지인들이 한국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큰 축복으로 A, J 부부는 제 앞서 누구에게나 저를 한국인이라고 먼저 소개하고, 저는 약간 더 마음을 여는 현지인들에게 정답게 다가 갈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치과의사는 다른 따이댕 마을을 소개하면서 귀신(‘피~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이들 종교가 정령/귀신 숭배이고 마을에 절은 없습니다.
또 ‘시엥쿠앙’은 베트남/비밀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가 집중적으로 폭탄을 쏟아 부은 곳이라 불발탄들이 땅 속에 있는 위험 지역이고, 해부된 폭탄 탄피(2m가량)는 집 기둥, 울타리, 야채 재배, 화분으로 사용됨을 흔히 봅니다.
1900m 정글; 꼬불꼬불 첩첩 산길 운전하심 보며 이런 산중에 사는 소수 종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탄탄한 차도, 함께 동역 할 사람도, 이런 길을 용감하게 운전할 담력도 없는 자신의 한계를 생각하는 순간 눈물이 고였는데....사실 비행기로 오면 되고(이런 마을 방문은 힘들겠지만)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면 되는데....이렇게 핑계하는 것이 저의 연약함인 것을 고백합니다.
14일 오후 7:30분 드디어 목적지 베트남 경계 ‘후오판 도’ 629Km ‘삼느아’도착, 예상대로 산속의 추위는 굉장했습니다. A님은 털모자를 사서 쓰고 다니셨고, 목요일 저녁은 약속대로 금식하며 내일의 일정을 진행하실 ㅎ나님을 기대하며 ㄱ도회를 가졌습니다. 밤에 스립핑빽 사용, 담요/쇼울을 그 위에 덮고, 양말 신고, 손은 겨드랑이에 넣고, 담요로 머리를 덮고, 새우잠을 잤습니다.
11월 15일 아침 일찍 강변을 걷는데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이는 광경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우리 일행도 남은 빠케트빵을 모닥불에 구워 먹고, 추워서 가는 곳마다 따뜻한 차를 마시게 됩니다. 따이담 일군 집으로 바로 찾아 가지 않고, 우리 숙소로 와서 만나 함께 가는 용의주도함도 필요합니다. 이 일군 부인이 따이댕 족이라 이 지역의 따이댕 소식을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차후에 점차적으로 훈련을 쌓아가면 지도자로 세워질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귀한 자매를 만나게 하신 ㅎ나님의 목적/여행의 목적을 깨닫습니다.
저녁 초대에 따이댕 지체들을 더 만나 격려할 수 있어 감사! 식사 후 자연스럽게 둘러 앉아 우리를 쳐다보며 기다리는 그들의 눈망울은 언제든지 ㅂ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따이담 족의 전도로 따이댕 족들 가운데 신자가 있음을 본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종족을 품고 오래 동안 실망(?)과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제게 용기와 소망을 주신 아버지의 계획에 놀랄 뿐입니다. 특별히 82세 되신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때에 대한 질문을 날카롭게 하심에 놀랬고, 전쟁 당시의 죽을 뻔한 고비를 나눌 때 정말 신나 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ㅎ나님께서 얼마나 이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느끼게 되어 감사했지요.
또 이곳에서 따이댕 족의 전통치마(‘씬’)와 전통음악(‘캅 따이댕’)을 구했는데 다음 여러분들을 뵐 때 보여드리겠습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내일 새벽 일찍 길을 떠나야 함을 설명하며 작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후에 컴퓨터에서 출력한 성ㄱ 자료들과 준비한 콩 씨앗 1Kg 전하며, 열심히 말씀 듣고 공부할 것과 씨앗을 여러 마을(따이댕 마을 2곳 포함)에 나누며 말씀도 전하는사역을 넓혀 갈 것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11월 16일 아침 6:30분 커피 한잔으로 아침식사대용 겸 추위를 극복; 산길을 빠져 가는데 산기슭에 구멍이 많이 있어 보니; 비밀전쟁 당시 베트남 군인들이 낮에는 이 굴에서(혼자 누울 정도 좁은 굴) 자고(트럭은 위장), 밤에 라이트 끈 채(미군 폭격 피함) 군용트럭을 몰아 물자 수송을 했답니다. 35년 전의 굴이라 많이 마모됐지만 역사적 증거물입니다. ‘삼느아’ 역시 미국 폭격이 엄청났고, 미군전투기도 많이 추락해 미국 군용숟가락(알리미늄)을 아직도 땅에서 주워서 파는 것을 시장에서 샀습니다. 역사적 물건이라 여러분들께 드려 ‘라’ 땅을 기억하여, 손 모아 주시길 부탁 드리고 싶네요.
이른 아침 안개는 한쪽 낭떠러지는 바다로, 먼 산봉우리는 막막한 바다의 섬 같은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올라간 산길을 다시 내려와서 북서쪽으로 400km 가는 길은 ‘후와판’ 도와 ‘루앙파방’ 도를 걸쳐가는데 호랑이가 있다는 안내 팻말이 있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였습니다. 약간 으시시~하지만 만약 차가 고장이 났다(?)하면 문제가 되는 곳; 거의 아침 내 달려도 다른 차들을 볼 수 없기에 도움을 받을 확률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마을을 지나지만 먹을 곳도 없어 늦게 식당을 발견한 마을에서 손으로 먹는 찹쌀밥과 파파야 샐러드(‘땀막쿵’)는 평생 먹은 점심 가운데 최고의 맛이었노라 운전하신 A님의 말씀!
운전하시면 부인은 성ㄱ을 읽고, 묵상을 서로 나누고, 또 책(이슬람)을 읽어 주고 또 나누고, 모든 종류의 씨디로 음악을 즐기고, 먼 길을 여행하시는 전문적 행동 방식과 준비도 인상적이었지만 두 분의 듀엣은 환상적이었고, 요
늦은 점심식사 후 몇 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우동사이’ 도의 ‘빡송’은 중국 음식점이 많아 놀랬고 저녁식사를 위해 들어간 집에서는 마작노름을 공개적으로 합니다. 중국어로 음식 주문하시는 J사모님의 유창한 언어에 놀래는 중국인들의 모습과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이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저녁 식사 후 계속 북서쪽으로 200Km 올라온 ‘우돔사이’는 이미 중국인 도시가 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순진한 ‘라’인은 더욱 가난해 지고 경제, 상업, 시장은 중국인이 독점하고 있으며, 버스정류장에는 현지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고, 안내도 중국어로 합니다. 모든 간판도 중국어입니다.
11월 17일 주일날 저는 ‘비엔티엔’ 으로,
사모님은 ‘복께오’ 집으로 가시고, A님은 ‘퐁살리’에 관개수로 컨설팅 일로 다시 북쪽 중국 국경 지역으로 가시고, 모두 흩어져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우돔사이’ 에서 비행기로 내려 오려고 계획했지만 화요일에만 비행기가 있어 당일 버스로 250Km 남쪽 ‘루앙파방’에 와서(6시간 소요) 다시 400Km 남쪽 ‘비엔티엔’ 으로 오는데 버스 문에 ‘자동문’이란 한국어가 적혀 있었고(한국차인 것을 자랑), 급 커버 길마다 천천히 안전 운행하는 기사의 조심성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중간 중간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산속 마을 사람들은 돈이 없어 짐을 지고도 버스를 타지 못하고 걷는 광경에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루앙파방’ 에서 12시간 걸려 ‘비엔티엔’에 도착한 것은 11월 18일
이번 여행은 사전에 전혀 계획이 없었지만 따이댕 종족을 향하신 하ㄴ님의 계획은 분명했고, 멤버가 없어 혼자인 줄 알았는데 다른 그룹의 일군이지만 함께 동역할 자들을 확인시켜주심으로 용기를 주시는 ㅎ나님은 정말 살아 계셔서 저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분이심을 또 경험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깊은 산골에서 ㅎ나님을 경외하는 소수의 따이댕 사람을 보게 하심은 놀랍고 큰 충격이었습니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이 그 종족 가운데 있다면 그 분의 구원은 가능성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손 모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 드리며 기쁨을 나눕니다. 사랑에 빚진 자로 다른 자를 섬김에 아낌없는 자신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1월 20일 말레시아 미디아 웍샵 참석차 출국하여 25일 돌아 옵니다. 안전과 배우는 내용들이 앞으로 잘 사용되는 것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 통해 아름다운 교제시간도 기대합니다.
12월 4일부터 8일 동안 소수 종족 현지인 훈련을 ‘라’ 안에서 처음 실시하려고 하는데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구전이야기를 잘 전하고, 종족사람들이 잘 이해하는 것과, 제가 따이 댕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 훈련을 받아야 할 올바른 사람들을 잘 선정하고, 또한 위험한 일들이 없기를 바라지만…, 있을지라도 잘 극복하는 지혜를 위해 손 모아 노래 불러주세요! 사랑합니다.
2008년 11월 18일 @@@@에서 OOO드림